/AI Chasm Catalyst

헨리 키신저, 에릭 슈밋, 크레이그 먼디라는 세 명의 거물급 저자가 공동 집필한 『새로운 질서』는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 미칠 파장을 다각도로 분석한 야심찬 작품이다. 전 미국 국무장관, 구글 전 CEO,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전 최고연구책임자라는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저자들의 협업은 그 자체로 이 책의 독특한 강점이자 한계를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인공지능을 단순한 기술적 현상이 아닌 문명사적 전환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저자들은 인쇄술의 발명이 중세 유럽의 질서를 뒤흔들었듯이, AI가 현재의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키신저의 지정학적 통찰력과 슈밋의 기술적 이해, 먼디의 연구개발 경험이 결합되어 AI의 영향력을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다층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데 성공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핵심 논제 중 하나는 AI가 기존의 권력 균형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는 예측이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 구도에서 AI 기술력이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라는 분석은 설득력 있다. 또한 AI가 인간의 인지적 우월성에 도전함으로써 인간 정체성 자체에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는 철학적 성찰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 책은 몇 가지 한계도 드러낸다. 첫째, 저자들이 모두 서구의 기득권층이라는 점에서 시각의 편향성을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AI의 영향을 논할 때 주로 강대국 중심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개발도상국이나 소외계층이 겪을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둘째, 기술 발전에 대한 지나치게 결정론적인 접근이 엿보인다. AI의 발전이 불가피한 것처럼 서술하면서, 인간 사회가 이를 통제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동적 역할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문체적 측면에서 이 책은 전문적이면서도 대중적 접근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복잡한 기술적 개념들을 역사적 사례와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은 효과적이다. 다만 세 명의 저자가 공동 집필한 만큼 문체의 일관성이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어떤 장은 키신저식의 웅변적 어조가 강하고, 다른 장은 슈밋의 기술적 정확성이 두드러지는 식이다.

이론적 기여도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이 완전히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AI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기존 논의들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이다. 오히려 저자들의 권위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경고’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이는 학술적 깊이보다는 정책적 시의성을 중시한 결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질서』는 AI 시대를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특히 정책 결정자들이나 기업의 전략 수립자들에게는 유용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다만 독자들은 이 책이 제시하는 미래상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AI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AI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수의 역할은 충실히 해내지만, 그 이후의 구체적인 대안 제시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변화의 거대함을 인식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실질적 지혜는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