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Chasm Catalyst

술잔을 기울여도 흐트러지지 않는 3D 그림. 이는 단순한 마술이 아니라, 일본의 주류 업체 산토리가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에서 선보인 '리드리스(Lidris)' 기술이 현실로 만든 예술이다.

이 작고 정밀한 로봇은 음료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라떼 아트를 넘어, 액체 내부에 입체적인 디자인을 정교하게 새기는 혁신을 통해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리드리스는 기술의 진화가 우리의 일상과 경험을 어떻게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물리법칙을 정복한 예술, 리드리스의 기술적 심장

리드리스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정밀함에 있다. 소형 로봇 팔 끝에 장착된 특수 노즐이 식용 잉크를 음료 속으로 주입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기계적 움직임이 아니다. 로봇은 음료의 점도, 밀도, 온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잉크가 액체 속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며 어떤 형태를 만들어낼지를 수학적으로 예측해야 한다.

이는 마치 수영장 속에서 특정 위치에 정확히 머물도록 물방울을 만드는 것과 같은, 극도의 섬세한 제어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정밀성의 배경에는 고도의 물리학적 계산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완성된 3D 디자인이 잔을 기울여도 형태를 유지하며 실내 온도에서 1시간 이상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KAIST 기계공학부의 김민준 교수는 이 기술에 대해 "리드리스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유체역학과 분자 간 상호작용을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제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며 "이는 AI가 가상 세계를 넘어 물리적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피지컬 AI'의 본질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사례"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제어가 가능한 이유는 '멀티모달 센싱'과 '적응형 제어 알고리즘' 덕분이다. 리드리스는 시각 센서로 음료의 상태를 파악하고, 촉각 센서로 로봇 팔의 미세한 움직임을 조절하며, 화학적 센서로 음료의 성분 변화를 감지한다.

이처럼 다양한 센서에서 들어오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융합해 최적의 주입 경로와 속도를 계산한다. 또한, 모든 음료가 동일한 물리적 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로봇은 각기 다른 온도와 당도, 점도를 가진 음료에 맞춰 스스로 학습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머신러닝 기반의 적응형 제어 시스템을 탑재했다.

◆ 일상과 산업을 바꿀 피지컬 AI의 파급력

리드리스가 제시하는 기술적 성취는 음료 한 잔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일상, 산업,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일으킬 잠재력을 품고 있다.

가장 먼저, 리드리스는 '개인 맞춤형 제조업'의 시대를 앞당길 것으로 기대된다. 대량 생산되는 획일적인 제품에서 벗어나,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과 요구에 맞춘 제품을 즉시 만들어내는 미래다.

카페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음료를 주문하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개인의 건강 상태나 기분에 맞춰 영양소를 조합한 식사나 음료를 로봇이 실시간으로 제조해 주는 세상이 곧 현실이 될 수 있다.

서비스업의 패러다임 역시 전환될 전망이다. 리드리스는 50cm 사방의 작은 공간과 일반 전원 콘센트만 있으면 설치가 가능하다. 이는 인력 운영이 어려운 소규모 점포나 24시간 운영이 필요한 공간에서 혁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숙련된 바리스타 없이도 고품질의 디자인 음료를 제공함으로써 인력 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직원은 고객 응대와 같은 더 중요한 서비스에 집중할 수 있게 돈다. 이는 인간과 로봇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등장을 촉진할 것이다.

교육 분야에서도 리드리스는 강력한 체험 학습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산토리는 이 기술을 교육 현장에 활용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추상적인 과학 개념을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체역학 시간에 실제 액체의 흐름을 제어하며 점도와 압력의 관계를 실험하고, 화학 시간에는 식용 잉크의 분자 구조가 어떻게 색상과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의 이수진 교수는 "복잡한 과학 원리를 교과서 속 그림이 아닌, 눈앞에서 펼쳐지는 예술적 현상으로 체험하게 할 때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흥미와 몰입도는 극적으로 상승한다"며 "리드리스는 이론 중심의 교육을 체험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혁신의 이면, 도전 과제와 성장의 발판

물론 리드리스가 나아갈 길에만 장미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장벽들이 존재한다. 가장 큰 과제는 '표준화'의 어려움이다. 현재 리드리스는 산토리가 특별히 개발한 전용 청량음료에서만 최적의 성능을 발휘한다.

시중에 판매되는 수많은 종류의 음료, 즉 탄산 함유량, 당도, 산도, 알코올 도수가 모두 다른 음료에 동일한 품질의 디자인을 구현하려면 각 음료의 물리적 특성에 맞춘 별도의 캘리브레이션(보정)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는 기술의 범용성을 확대하고 대중화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비용 대비 효용성'이다. 고도의 정밀 제어 기술과 다수의 센서, 복잡한 알고리즘을 탑재한 만큼, 리드리스의 초기 도입 비용은 결코 저렴하지 않을 것이다.

카페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소상공인들이 이 기술을 부담 없이 도입할 수 있을 만큼 비용 효율적인 솔루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기술의 가치가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 과제들은 오히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리드리스는 산업 현장의 거대 로봇이 아닌, 우리 곁에 놓일 소형 데스크톱 로봇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음료에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는 식용 잉크 기술은 바이오 소재 산업의 새로운 블루오션을 열 수 있다. 토마토에서 추출한 리코펜 색소나 나무 껍질에서 얻는 천연 색소처럼, 자연 유래 성분을 활용한 기능성 첨가제 시장이 리드리스와 함께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술 민주화를 향한 첫걸음, 그리고 10년 후의 우리

산토리의 리드리스는 2023년 세계最大的 가전 전시회인 CES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리퀴드 드로잉' 기술의 상용화 결과물이다. 불과 2년 만에 연구실의 아이디어가 실제 상용 제품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피지컬 AI 기술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리드리스가 단순한 음료 제조 로봇을 넘어 미래를 향한 중요한 신호탄이 되는 이유는 '기술의 접근성'에 있다. 복잡한 코딩이나 기술적 지식 없이도 태블릿 PC의 터치 몇 번으로 원하는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은 '기술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다.

파트타이머도 쉽게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는 앞으로 모든 피지컬 AI 시스템이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를 제시한다.

▶10년 후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AI가 수면 패턴을 분석해 그날의 컨디션에 맞는 원두와 추출 시간으로 커피를 내려주고, 점심에는 혈당과 영양 상태를 고려해 개인 맞춤형 영양 밀크를, 저녁에는 하루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허브티를 로봇이 정성껏 만들어 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리드리스가 보여준 정밀한 유체 제어 기술과 개인 데이터에 기반한 맞춤형 알고리즘이 작동할 것이다.

산토리의 리드리스는 그런 미래를 향한 첫 번째 작품이다. 술잔 속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3D 그림 하나하나는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인류가 꿈꿔온 더 편리하고, 더 개인화되며, 더 풍요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작지만 확실한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