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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감축 우선시하며 소비·투자 동반 위축
중국 경제가 자산 가격 하락과 과도한 부채 부담으로 인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유사한 장기 침체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블룸버그는 2025년 8월 14일 보도를 통해 중국이 기업과 가계 모두 지출보다 부채 상환을 우선시하는 ‘밸런스시트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밸런스시트 불황은 자산 가격이 급락한 이후에도 부채는 그대로 남아있어, 경제 주체들이 새로운 투자나 소비 대신 기존 채무 해결에 집중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 경제학자 리처드 쿠(Richard Koo)가 1990년대 일본 버블 붕괴 이후 상황을 설명하면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부동산 시장 붕괴가 촉발한 연쇄 위기
현재 중국 경제의 핵심 문제는 부동산 부문의 심각한 침체다. 2021년 헝다그룹 사태 이후 본격화된 부동산 위기는 전체 GDP의 약 25~30%를 차지하는 부동산 관련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니콜라스 라디 선임연구원은 “중국 가계 자산의 약 70%가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주택 가격 하락은 직접적인 자산 감소 효과를 낳고 있다”며 “이는 소비 심리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중국 국가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주요 70개 도시 신규 주택 가격은 전년 대비 평균 4.5% 하락했으며, 일부 2~3선 도시에서는 10% 이상의 급락세를 보였다.
기업과 가계 모두 ‘디레버리징’ 모드로 전환
중국 인민은행 통계를 보면 2024년 민간 부문 신규 대출 증가율이 2023년 대비 30% 이상 감소했다. 이는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자제하고 기존 부채 상환에 주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황이핑 교수는 “현재 중국 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GDP 대비 160%를 넘어서면서 추가 차입 여력이 크게 제한되고 있다”며 “정부의 유동성 공급 확대에도 불구하고 실물 경제로의 자금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가계 부문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 가계부채는 2023년 말 기준 GDP 대비 63.5%로 10년 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이 전체 가계부채의 70% 이상을 차지하면서 부동산 가격 하락이 가계 재무 건전성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디플레이션 압력 증가와 정책 딜레마
소비자물가지수(CPI)가 2024년 하반기 들어 0%대 저성장을 지속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이미 12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골드만삭스 아시아 수석 이코노미스트 앤드류 틸턴은 “디플레이션 기대가 고착화되면 실질 부채 부담이 증가하면서 밸런스시트 불황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정부는 기준금리 인하와 지방정부 특별채권 발행 확대 등 경기 부양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구조적 문제 해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재정 확대 정책도 중앙정부 부채 비율이 GDP 대비 90%에 근접하면서 여력이 제한적이다.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중국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하락할 경우 세계 경제성장률이 0.3%포인트 감소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원자재 수출국과 아시아 주변국들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한국의 경우 대중국 수출 비중이 전체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어 영향이 불가피하다. 한국무역협회는 중국 내수 위축이 지속될 경우 한국의 중간재와 자본재 수출이 연간 5~10% 감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경제학부 김소영 교수는 “중국의 밸런스시트 불황이 현실화되면 한국 경제는 수출 감소와 함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압력에 직면할 것”이라며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대중 의존도가 높은 산업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장기 침체 가능성과 대응 과제
일본의 사례를 볼 때 밸런스시트 불황은 극복하는 데 10년 이상의 장기간이 소요될 수 있다.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 20년 넘게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중국이 일본식 장기 침체를 피하려면 부실 채권 정리와 함께 과감한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며 “특히 국유기업 개혁과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한 내수 진작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중국 당국도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4년 12월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는 ‘합리적인 경제성장 유지’와 함께 ‘금융 리스크 방지’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의 경직성과 지방정부의 재정 악화 등이 효과적인 정책 대응을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시진핑 정부의 ‘공동부유’ 정책과 시장 친화적 개혁 사이의 모순이 정책 일관성을 저해하고 있다는 평가다.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 버트 호프만 소장은 “중국이 밸런스시트 불황을 극복하려면 단기적 경기 부양책보다는 장기적 관점의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며 “특히 민간 부문의 활력을 되살리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